간밤에는, 악몽을 꾸겠거니 생각했음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푹 잘 수 있었다. 단지 평소의 수면시간보다 훨씬 부족한 시간을 채웠을 뿐으로, 아직 잠이 덜 가신 카프카는 별 생각 없이 벗고 있는 상체를 손으로 북북 긁고는 하품을 쩌억 했을 뿐이었다.
잠들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혹은 고의적으로- 중얼거렸던, 리하르트를 만나러가야겠다는 말을 기억해 낸 것은 샤워를 하고 나온 뒤였다. 밤새 격한 운동을 하여 뭉쳐있던 근육들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적당히 풀어주어 상쾌해진 몸 위로 얇은 드레스셔츠를 걸치며 카프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평소와 조금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평소와 조금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그러나, 일어났을 때부터, 혹은 잠들기 전부터 느껴지던 심장의 고동은 평소와는 살짝 다른 것이었다. 정말로, 아주 살짝.
초조함으로 다급해진 자신의 발걸음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한낮의 따뜻한 햇볕에 분명 자신은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경쾌하게, 너무도 경쾌하게. 안면이 있는 몇몇의 이 낙원의 주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기까지 하며 자신은 오래간만의 바깥나들이에 들떠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리하르트가 있을 병원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발목을 채어 감는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과 불쾌함에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초조함이라 이름 붙이면 초조함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이었고, 불안함이라 이름 붙이면 불안함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느긋하게. 애써 자신을 가다듬으면서도 빨라지는 발걸음을 막을 수 없어, 종국에는 뛰다 싶이 하여 그의 병원을 찾았다. 왜인지도 모르면서. 어째서인지도 모르면서.
숨을 가다듬고 노크를 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왜이리 길게 느껴졌는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몇 십초, 라는 극히 짧은 시간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자기 자신이 놀랄 정도로 신경질과 초조함이 머리끝까지 타고 올랐으나, 다행히도 리하르트는 금방 문을 열어주었다.
은빛 눈에 자신이 비치고, 놀란 듯 조금은 커진 눈동자가 내리 깐 눈꺼풀에 가려져,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는 리하르트를 본 순간 카프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힘껏 끌어안고 말았다.
평안함을 가장한 어색한 시간이 조금 흘렀다. 리하르트는 카프카의 품에 끌어 안겨, 무섭게 뛰는 그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시만 시간이 지나면 진정이 되어 풀어주겠지, 생각하던 리하르트의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오랜 시간동안 카프카는 리하르트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강한 힘으로 구속당한 몸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져 몸을 조금 움직이려는 순간 귓가와 닿아있는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숨의 이름은 「안도」였다.
"---갑작스럽게 죄송했습니다, 리하르트씨."
살짝 거리를 벌린 카프카는 무안하다는 듯이 귓불을 매만지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따라가 바라본 그의 귓불은 붉게 물들어 있어, 리하르트를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는 대신에 고개를 저었다. 쿵, 쿵, 쿵, 쿵. 커다랗게 울리던 그의 심장 소리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던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안도하였다. 자기 자신이 진정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조금도 알지 못 한 채, 리하르트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는 카프카의 말에 현관에서 조금 비켜줌으로써 그를 허락했을 뿐이었다.
-뭔가 마실 것이라도?
"리하르트씨가 주신다면 냉수 한잔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꼬시기용 멘트에 카프카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리하르트는 신경 안정에 좋을만한 허브티를 머릿속으로 하나씩 짚어본 뒤 능숙하게 찻물을 올렸다. 이윽고 카프카의 앞에 솜씨 좋게 우러난 허브티가 놓이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카프카는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일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훌륭했다. 아마도, 아니 필히, 끓이는 사람의 정성이 녹아있어서겠지. 기분 좋은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고돌았다.
"'오필리아'- 라고 하면,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질문의 의미가 아닌 독백과 가까운 말투였다.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으려던 리하르트는 그를 깨닫고는 가만히 펜을 내려놓았다. 그런 리하르트의 배려에,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 카프카는 빙긋 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조용조용한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허브티의 향이 맴돌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말로 치장해보아야 어차피 오필리아는 나약한 여자였을 뿐이지요. 상처를 견뎌내지 못 하고 미쳐버린."
따뜻해 보이는 다갈색의 눈동자 안에는 차가움이 묻어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은색의 눈동자 안에는 따뜻함이 묻어있었다.
어째서일까.
그 눈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카프카는 자문했다. 어째서일까. 그는 한없이 따뜻해 보였다. 차가운 흑청빛 머리카락도, 색이 옅은 은빛 눈동자도. 그렇게나 따뜻해 보여, 카프카는 그만 시선을 내려버리고 말았다. 말간 찻물 위로 자신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비틀려 보였다.
"리하르트씨는 잡지종류는 잘 보시진 않으시겠지만, 지나가는 말로 한 번 정도는 들어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데이비드 라스텔, 이라고."
-전에 근무하던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직업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모델입니다. 최정상의. 시즌마다 그가 런웨이... 그러니까 패션쇼 장에서 우스꽝스러운 옷을 걸치고 한 번 걸어오는 데에만 받는 돈이 몇억씩 하니까요."
-그런 세계도 있군요.
"예. 그런 세계도 있지요. 그리고 저와 매우 깊이 닿아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를 처음 런웨이에 올린 것은 삼류 디자이너였고, 정상까지의 길을 열어준 것은 저였으며, 정상으로 올라간 것은 그의 능력이었습니다."
확실히, 자신이 사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잡지 속, 그리고 TV의 흥미 위주의 연애방송에서만 나오던 말을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리하르트는 조금의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세계였으나, 그러나 자신의 분야에서 최정상을 달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리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리가 되지 않은 그의 목소리를, 그러나 카프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시금 눈을 마주쳐온 그는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이런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으시다면, 계속 이어가도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부탁을... 저, 리하르트씨의 머리카락을 만져도 괜찮겠습니까?"
고개를 젓는 것도 끄덕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제 좋을대로 허락이라고 생각한 카프카는, 마주보고 있던 자리에서 리하르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올이 가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손끝으로 더듬어오다 끝내는 온기가 느껴지는 머리카락 안쪽까지 손가락을 밀어 넣어 쓰다듬는 그 행위에 리하르트는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의 분야 -내과- 와는 다르고, 카프카 역시 일반적인 절차를 밟은 환자는 아니었으나, 그는 리하르트를 의지해 찾아온 환자였다. 리하르트는 아마도 카프카의 직업과 연관 시켜서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정도로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에까지 생각이 미친 카프카는 다시금 미소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머리카락을 만짐으로 인해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란 그에게 소중한 사람들로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 그의 아버지, 오롯이 자신만을 믿어주는 두 명의 친구, 그리고 과거 미친 듯이 사랑했던 연인.
리하르트의 머리카락을 한없는 애정을 담아 매만지면서 카프카는 불안함이 씻겨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으나, 단지 자신에 대해 의문이 생길 뿐이었다. 불현듯 과거 치기 어린 시절에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술김에 했던, 그러나 진담 - 진심인 사람과는 안 자.
마음에 들면 일단 쓰러트리고 뒷일은 나중에, 였던 자신이,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던 리하르트를 어떻게 해보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카락을 파고든 손끝에 더욱 애정이 실렸다.
"...제 부적응 판별 사유를 알고 계십니까?"
-실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부적응 사유는 알고있지 않습니다.
"저는, 게이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기실은 놀랐으나 리하르트는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카프카의 말 속에는 짙은 자조가 묻어있었다. 확실히 자신의 입으로 '정상이 아니다.' 라 고백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이 곳'에 리하르트가 있기에. 같은 낙오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한 번 떨어진 입은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고 있었다.
"데이비드를 처음 보았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이 그리 잘 어울릴 수가 없었죠. 그를 무대에 올린 디자이너도, 겨우 그 정도 무대에밖에 그를 보내지 않은 모델 에이젼시도, 서툴고 어울리지도 않은 화장이며 머리모양을 한 그도, 그저 기가 막힐 정도로 놀랍고 또 우스웠습니다. 어쩜 그렇게들 보는 눈이 없는 건지, 그게 아니면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였습니다만.
그래서 그를 걸고, 또 '오필리아'라는 저의 이름을 걸고 도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공하였습니다 - 그냥 성공도 아니고, 잭팟이 터졌지요. 그의 나이 18살 때였고, 그가 처음으로 최정상의 런웨이에 당당하게 오른 날, 10살 넘게 어린 그 아이와 저는 섹스를 했습니다."
긴, 말이 끝난 후 카프카는 리하르트의 안색을 살폈다. 식어버린 허브티를 입으로 가져가는 손끝도, 바라보고 있는 눈빛도 동요는 없었다. 그에 필요 이상으로 안도한 자신을 깨닫고, 슬며시 벌어지는 입가를 가리기 위해 카프카 역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허브티는 이미 미적지근해져있었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저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카프카 임, 이라는 본명 말이지요. ...그렇군요,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공무원들을 제외하고 실제로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대여섯 명 정도일까요. 저는 그렇게 철저하게 본명을 감추고 예명으로 활동해왔습니다. 몸을 섞은 상대는 물론이고, 잠시간의 연인을 상대로도 언제나 마찬가지로. 이년 가까이 동침해온 데이비드조차 저의 본명을 모를 정도라고 하면, 아시겠습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이유를 묻지 않는 그의 배려가 카프카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그는, 단순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익숙해 보이는 배려였다. 문득 주머니에 들어있는 담배가 몹시 그리웠으나, 리하르트의 앞에서 흡연은 하고싶지 않았다. 니코틴 부족으로 초조해진 손끝에서 핏기가 가시며 차가워짐을 알 수 있었다.
"그 데이비드와, 오늘 새벽에 다시 만났습니다. '침입자'와 '주민' 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그제서야 배려인지 무관심인지 모를 눈빛이 똑바로 카프카를 바라봤다. 놀란 눈빛이다. 그 눈꺼풀에 입술을 찍어누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카프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손끝이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도 살인은 살인이지요. 말로는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지만, 데이비드를 정말로 살리고 싶었다면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절했던 그 때 아름다운 마담에게로 데려갔어야 했을 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말라'고 말해놓고 진실을 속삭여 거짓을 택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식의 고통에 대한 위로를 리하르트는 알지 못 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에 차갑게 식은 손끝을 묻은 채 더 이상 쓰다듬지 않는 카프카의 손을 조심히 잡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 손에 온기가 돌아오길 바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프카를 바라보며 순간, 리하르트는 그가 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고, 이제야 알아차렸지만, 마치 찍어낸 듯 똑같은 미소를 다시 한 번 그에게 지어보인 카프카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건조하였다.
"...염치없지만, 부탁하나 더 드려도 괜찮을까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헤르 카프카.
"헤르는 빼고 부르셔도 괜찮다고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카프카, 라고, 한 번만 불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제가 목소리를 낼 만한 상태가 아니라서 그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작게라도 상관없습니다. 리하르트씨. 당신의 목소리로, 한 번만 불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리하르트의 입술이 머뭇거리며 작게 벌어졌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카프카는 고요하게 그를 기다렸다. 한참을 닫혀 있던 리하르트의 입술이 작게 열리고, 그리고, 카프카는 그제서야 제대로 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