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판타지고 무협이고 현대물이고간에 이름짓기 제일 힘든건 역시 이름이네요ㅇ>-< 이런 제기랄

쓰고있는 무협인지 판타지인지 여튼 고전물이 하나 있긴 한데 이놈들 이름짓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그냥 적당히 한자 짬뽕해서 만들면 짠 튀어나오니 그나마 서양이나 중세풍판타지보다 낫긴 하네요. 그러나 난 전에 C동에서 봤던 호모무협 주인공의 이름이 '전나세'와 '염병환' 이었다는 것을 잊지 못하겠어요. 이런 제기랄.




by YukiHi | 2007/10/15 23:44 | Diary | 트랙백 | 덧글(2)

[마사섬] 고해성사


  간밤에는, 악몽을 꾸겠거니 생각했음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푹 잘 수 있었다. 단지 평소의 수면시간보다 훨씬 부족한 시간을 채웠을 뿐으로, 아직 잠이 덜 가신 카프카는 별 생각 없이 벗고 있는 상체를 손으로 북북 긁고는 하품을 쩌억 했을 뿐이었다.
  잠들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혹은 고의적으로- 중얼거렸던, 리하르트를 만나러가야겠다는 말을 기억해 낸 것은 샤워를 하고 나온 뒤였다. 밤새 격한 운동을 하여 뭉쳐있던 근육들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적당히 풀어주어 상쾌해진 몸 위로 얇은 드레스셔츠를 걸치며 카프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평소와 조금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평소와 조금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그러나, 일어났을 때부터, 혹은 잠들기 전부터 느껴지던 심장의 고동은 평소와는 살짝 다른 것이었다. 정말로, 아주 살짝.

 

 

 

 

 

 


  초조함으로 다급해진 자신의 발걸음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한낮의 따뜻한 햇볕에 분명 자신은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경쾌하게, 너무도 경쾌하게. 안면이 있는 몇몇의 이 낙원의 주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기까지 하며 자신은 오래간만의 바깥나들이에 들떠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리하르트가 있을 병원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발목을 채어 감는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과 불쾌함에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초조함이라 이름 붙이면 초조함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이었고, 불안함이라 이름 붙이면 불안함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느긋하게. 애써 자신을 가다듬으면서도 빨라지는 발걸음을 막을 수 없어, 종국에는 뛰다 싶이 하여 그의 병원을 찾았다. 왜인지도 모르면서. 어째서인지도 모르면서.
  숨을 가다듬고 노크를 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왜이리 길게 느껴졌는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몇 십초, 라는 극히 짧은 시간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자기 자신이 놀랄 정도로 신경질과 초조함이 머리끝까지 타고 올랐으나, 다행히도 리하르트는 금방 문을 열어주었다.
  은빛 눈에 자신이 비치고, 놀란 듯 조금은 커진 눈동자가 내리 깐 눈꺼풀에 가려져,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는 리하르트를 본 순간 카프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힘껏 끌어안고 말았다.

 

 

 

  평안함을 가장한 어색한 시간이 조금 흘렀다. 리하르트는 카프카의 품에 끌어 안겨, 무섭게 뛰는 그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시만 시간이 지나면 진정이 되어 풀어주겠지, 생각하던 리하르트의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오랜 시간동안 카프카는 리하르트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강한 힘으로 구속당한 몸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져 몸을 조금 움직이려는 순간 귓가와 닿아있는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숨의 이름은 「안도」였다.

  "---갑작스럽게 죄송했습니다, 리하르트씨."

  살짝 거리를 벌린 카프카는 무안하다는 듯이 귓불을 매만지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따라가 바라본 그의 귓불은 붉게 물들어 있어, 리하르트를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는 대신에 고개를 저었다. 쿵, 쿵, 쿵, 쿵. 커다랗게 울리던 그의 심장 소리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던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안도하였다. 자기 자신이 진정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조금도 알지 못 한 채, 리하르트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는 카프카의 말에 현관에서 조금 비켜줌으로써 그를 허락했을 뿐이었다.

 

 

 

 

  -뭔가 마실 것이라도?
  "리하르트씨가 주신다면 냉수 한잔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꼬시기용 멘트에 카프카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리하르트는 신경 안정에 좋을만한 허브티를 머릿속으로 하나씩 짚어본 뒤 능숙하게 찻물을 올렸다. 이윽고 카프카의 앞에 솜씨 좋게 우러난 허브티가 놓이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카프카는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일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훌륭했다. 아마도, 아니 필히, 끓이는 사람의 정성이 녹아있어서겠지. 기분 좋은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고돌았다.


  "'오필리아'- 라고 하면,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질문의 의미가 아닌 독백과 가까운 말투였다.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으려던 리하르트는 그를 깨닫고는 가만히 펜을 내려놓았다. 그런 리하르트의 배려에,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 카프카는 빙긋 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조용조용한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허브티의 향이 맴돌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말로 치장해보아야 어차피 오필리아는 나약한 여자였을 뿐이지요. 상처를 견뎌내지 못 하고 미쳐버린."

  따뜻해 보이는 다갈색의 눈동자 안에는 차가움이 묻어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은색의 눈동자 안에는 따뜻함이 묻어있었다.

  어째서일까.

  그 눈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카프카는 자문했다. 어째서일까. 그는 한없이 따뜻해 보였다. 차가운 흑청빛 머리카락도, 색이 옅은 은빛 눈동자도. 그렇게나 따뜻해 보여, 카프카는 그만 시선을 내려버리고 말았다. 말간 찻물 위로 자신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비틀려 보였다.

  "리하르트씨는 잡지종류는 잘 보시진 않으시겠지만, 지나가는 말로 한 번 정도는 들어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데이비드 라스텔, 이라고."
  -전에 근무하던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직업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모델입니다. 최정상의. 시즌마다 그가 런웨이... 그러니까 패션쇼 장에서 우스꽝스러운 옷을 걸치고 한 번 걸어오는 데에만 받는 돈이 몇억씩 하니까요."
  -그런 세계도 있군요.
  "예. 그런 세계도 있지요. 그리고 저와 매우 깊이 닿아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를 처음 런웨이에 올린 것은 삼류 디자이너였고, 정상까지의 길을 열어준 것은 저였으며, 정상으로 올라간 것은 그의 능력이었습니다."

  확실히, 자신이 사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잡지 속, 그리고 TV의 흥미 위주의 연애방송에서만 나오던 말을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리하르트는 조금의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세계였으나, 그러나 자신의 분야에서 최정상을 달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리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리가 되지 않은 그의 목소리를, 그러나 카프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시금 눈을 마주쳐온 그는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이런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으시다면, 계속 이어가도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부탁을... 저, 리하르트씨의 머리카락을 만져도 괜찮겠습니까?"

  고개를 젓는 것도 끄덕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제 좋을대로 허락이라고 생각한 카프카는, 마주보고 있던 자리에서 리하르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올이 가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손끝으로 더듬어오다 끝내는 온기가 느껴지는 머리카락 안쪽까지 손가락을 밀어 넣어 쓰다듬는 그 행위에 리하르트는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의 분야 -내과- 와는 다르고, 카프카 역시 일반적인 절차를 밟은 환자는 아니었으나, 그는 리하르트를 의지해 찾아온 환자였다. 리하르트는 아마도 카프카의 직업과 연관 시켜서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정도로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에까지 생각이 미친 카프카는 다시금 미소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머리카락을 만짐으로 인해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란 그에게 소중한 사람들로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 그의 아버지, 오롯이 자신만을 믿어주는 두 명의 친구, 그리고 과거 미친 듯이 사랑했던 연인.
  리하르트의 머리카락을 한없는 애정을 담아 매만지면서 카프카는 불안함이 씻겨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으나, 단지 자신에 대해 의문이 생길 뿐이었다. 불현듯 과거 치기 어린 시절에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술김에 했던, 그러나 진담 - 진심인 사람과는 안 자.
  마음에 들면 일단 쓰러트리고 뒷일은 나중에, 였던 자신이,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던 리하르트를 어떻게 해보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카락을 파고든 손끝에 더욱 애정이 실렸다.

  "...제 부적응 판별 사유를 알고 계십니까?"
  -실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부적응 사유는 알고있지 않습니다.
  "저는, 게이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기실은 놀랐으나 리하르트는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카프카의 말 속에는 짙은 자조가 묻어있었다. 확실히 자신의 입으로 '정상이 아니다.' 라 고백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이 곳'에 리하르트가 있기에. 같은 낙오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한 번 떨어진 입은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고 있었다.

  "데이비드를 처음 보았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이 그리 잘 어울릴 수가 없었죠. 그를 무대에 올린 디자이너도, 겨우 그 정도 무대에밖에 그를 보내지 않은 모델 에이젼시도, 서툴고 어울리지도 않은 화장이며 머리모양을 한 그도, 그저 기가 막힐 정도로 놀랍고 또 우스웠습니다. 어쩜 그렇게들 보는 눈이 없는 건지, 그게 아니면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였습니다만.
  그래서 그를 걸고, 또 '오필리아'라는 저의 이름을 걸고 도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공하였습니다 - 그냥 성공도 아니고, 잭팟이 터졌지요. 그의 나이 18살 때였고, 그가 처음으로 최정상의 런웨이에 당당하게 오른 날, 10살 넘게 어린 그 아이와 저는 섹스를 했습니다."

  긴, 말이 끝난 후 카프카는 리하르트의 안색을 살폈다. 식어버린 허브티를 입으로 가져가는 손끝도, 바라보고 있는 눈빛도 동요는 없었다. 그에 필요 이상으로 안도한 자신을 깨닫고, 슬며시 벌어지는 입가를 가리기 위해 카프카 역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허브티는 이미 미적지근해져있었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저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카프카 임, 이라는 본명 말이지요. ...그렇군요,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공무원들을 제외하고 실제로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대여섯 명 정도일까요. 저는 그렇게 철저하게 본명을 감추고 예명으로 활동해왔습니다. 몸을 섞은 상대는 물론이고, 잠시간의 연인을 상대로도 언제나 마찬가지로. 이년 가까이 동침해온 데이비드조차 저의 본명을 모를 정도라고 하면, 아시겠습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이유를 묻지 않는 그의 배려가 카프카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그는, 단순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익숙해 보이는 배려였다. 문득 주머니에 들어있는 담배가 몹시 그리웠으나, 리하르트의 앞에서 흡연은 하고싶지 않았다. 니코틴 부족으로 초조해진 손끝에서 핏기가 가시며 차가워짐을 알 수 있었다.

  "그 데이비드와, 오늘 새벽에 다시 만났습니다. '침입자'와 '주민' 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그제서야 배려인지 무관심인지 모를 눈빛이 똑바로 카프카를 바라봤다. 놀란 눈빛이다. 그 눈꺼풀에 입술을 찍어누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카프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손끝이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도 살인은 살인이지요. 말로는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지만, 데이비드를 정말로 살리고 싶었다면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절했던 그 때 아름다운 마담에게로 데려갔어야 했을 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말라'고 말해놓고 진실을 속삭여 거짓을 택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식의 고통에 대한 위로를 리하르트는 알지 못 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에 차갑게 식은 손끝을 묻은 채 더 이상 쓰다듬지 않는 카프카의 손을 조심히 잡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 손에 온기가 돌아오길 바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프카를 바라보며 순간, 리하르트는 그가 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고, 이제야 알아차렸지만, 마치 찍어낸 듯 똑같은 미소를 다시 한 번 그에게 지어보인 카프카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건조하였다.

  "...염치없지만, 부탁하나 더 드려도 괜찮을까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헤르 카프카.
  "헤르는 빼고 부르셔도 괜찮다고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카프카, 라고, 한 번만 불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제가 목소리를 낼 만한 상태가 아니라서 그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작게라도 상관없습니다. 리하르트씨. 당신의 목소리로, 한 번만 불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리하르트의 입술이 머뭇거리며 작게 벌어졌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카프카는 고요하게 그를 기다렸다. 한참을 닫혀 있던 리하르트의 입술이 작게 열리고, 그리고, 카프카는 그제서야 제대로 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by YukiHi | 2007/10/14 20:58 | 트랙백 | 덧글(0)

[마사섬] 천국에도 그림자는 진다.


  천국(天國). 하늘나라. 낙원(樂園).
  내세를 믿는 것은 아니기에 천국이고 하늘나라고 모두 추상적인 '낙원'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낙원이라고. ...낙원이라고.

  그래.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처럼.

 

 

 

 

 

 


  카프카는 무언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설핏 잠을 깼다. 어떤 착하신 분께서 내 잠을 깨우셨을까, 생각하면서도, 오후 3시 즈음에 침대에 파고들어 낮잠을 청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사이드테이블 위의 디지털 시계는 연한 초록빛을 내며 지금의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4시 44분. 빌어먹게도 좋은 시간이다.
  그래도 자야지. 아직은 모두가 자야할 시간이니까- 생각하며 다시 머리를 폭신폭신한 베개에 파묻은 뒤 잠을 청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짓이기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멍한 머리가 활동을 재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자신은 누군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깬 것 아니었던가.

  "...빌어먹을. 무슨 집에 먹을 것 하나도 없어."
  "먹는 것도 귀찮으니까요.. 누구십니까...?"

  그제야 한껏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검은 그림자가 흠칫거리며 자신에게 무언가를 겨누는 것이 보인다. 어디서 좀도둑이라도 들었나, 생각하다 아름다운 마담이 침입자를 조심하라 했던 것을 생각해내었다.

  제기랄, 좇됐네.

  그러나 카프카는 당황함을 조금도 내색치 않고 잠으로 뻣뻣해진 몸을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핏 보인 실루엣이라던가 목소리에 의하면 남자. 그것도 상당히 잘 빠진 남자다. 무의식적으로 침을 꼴깍 넘기며 카프카는 인영(人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무슨 배짱으로 들어오셨을까요. 여러 가지로 위험하지 않으십니까."
  "위험한건 당신이겠지."

  남자의 기세가 흉흉해짐을 깨달았지만 카프카는 여전했다. 하품을 쩌억 하고 눈을 슥슥 비비고는 침대머리에 기대앉는 폼이 여유롭기까지 하여, 남자는 조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실상 카프카 자신은, 죽던 죽이던 상관하지 않는 것 뿐이었으나 남자가 그를 알 리가 없었다. 시트가 흘러내리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이 드러났다. 카프카가 전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조금 자신감이 생긴 듯, 들고 있던 흉기 - 피마저 묻어 있는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들고 카프카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달빛이 비추었다. 들쭉날쭉 사납게 깎인 남자의 머리카락부터 천천히 그의 생김새가 드러났다.

  "....데이비드?"
  "오필리아...?"

  이런 제기랄. 남자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카프카는 그저 웃으며 말을 건냈다.

  "오랜만이군요, 데이비드. 그나저나 그 머리,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겁니까? 당신에게는 긴 머리가 어울린다고 분명 말 했을 텐...."

  달려든 남자는 물어뜯을 듯 오필리아, 카프카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지친 듯 늘어져 헐떡거리는 카프카의 옆에서 남자, 데이비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가 저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백한 강간이었다. 살인죄까지 저지른 마당에 강간죄가 추가된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그가 저지른 살인은 -그의- 정의로운 것이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이 세계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나 지금 이 곳, 이 낙원에서 저지른 강간은 그의 잘못이었으며, 실책이었다. 죄의식이 머릿속을 맴돌아 그는 머리를 쥐고 신음했다.

  "꽤 쌓였었나보군요, 데이비드."
  "........"
  "아니면 피냄새에 취했다거나?"
  "..........."
  "강간 아닙니다, 데이비드. 나도 즐겼으니 화간인 것이죠."
  "...하긴, 오필리아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고, 자고 싶다하면 자고 아무리 거칠게 다뤄도 즐기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어."
  "그래도 난 '사람'입니다, 데이비드."
  "........."
  "고작 피에 취해서 사람을 덮치다니, 그러니까 아직까지 어린애라는 겁니다, 데이비드."

  데이비드 라스텔. 21살의, 소위 '정상급' 모델이었다. 런웨이 위의 황제. 시즌마다 최상급 디자이너들의 러브콜을 받는 그의 데뷔는 초라하였으나, 카프카가 그를 끌어올려 주었다. 삼류 디자이너의 초라한 무대에서 데뷔한 그를 알아봐준 것은 카프카 한 사람 뿐이었고, 그를 통해 데이비드는 황제의 자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오필리아."
  "그냥. 어쩌다보니?"
  "말장난 하고 싶은 기분 아니야!"
  "리틀 데이비드. 아직까지 그 버르장머리는 고치지 못 했군요 - 왜냐니, 이 낙원에서 최후를 기다리기 때문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먹을 움켜쥔 채 화를 참는 데이비드의 얼굴을 보고 카프카는 미소지었다. 힘이 꽉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그의 아름다운 손으로 잡아오자, 그제야 데이비드가 카프카와 시선을 맞춰왔다.

  "도망가세요."
  "...뭐?"
  "여기에 있으면 둘 중 하나입니다, 데이비드. 죽거나, 갱생당하거나. 둘 다 싫겠지요?"
  "내가 이기는 방법도 있어."
  "불가능합니다, 데이비드. 자, 어른 말을 듣도록 해요."

  아이를 어르듯 뺨을 토닥토닥거리는 손에 험악하게 구겨졌던 인상이 곧 탁 풀렸다. 몸을 섞은 남자의 부드러운 권유에 마음이 풀리는 것을 깨닫고, 데이비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난폭하게 처박아두었던 옷을 꺼내 입었다. 형편없이 구겨져 있는 그 옷들을 보고, 카프카는 시트로 몸을 가린 채 일어나 벽장에서 옷가지 몇 개를 내주었다. 피에 절어 구깃구깃한 옷들을 입고있었을 때 보다 그는 빛나 보였다. 런웨이 위가 아닌 이 곳에서도 그는 당당한 황제였다. 카프카는 그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다시 침대로 파고 들었다.

  "오필리아."
  "가려면 어서 가시죠, 데이비드. 나는 졸립니다."
  "....고마워."

  쑥스러운 듯 말하는 남자의 등에 대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데이비드, 하고 부르는 웃음 섞인 소리에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분명 붉어진 얼굴을 가리느라 고생하고 있을 그의 어린 황제를 보며, 카프카는 베개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데이비드, 데이비드. 나를 오필리아라고만 부르는 데이비드. 나의 본명조차 모르는 데이비드."
  "....오필리아?"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말 한 적이 있을 겁니다. '공인(公人)의 말을 믿지 말라' 고.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오필...!"

  타앙-! 하고, 총소리가 울렸다. 남자의 몸은 힘없이 바닥을 향해 낙하했다.

  "즐긴건 둘째치고 강간은 강간이니까, 벌을 받아야지요. 우리 어린 황제님?"

  카프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덩치값을 좀 해야겠네요, 데이비드."
  "......오필....이런 망할...!"
  "겨우 제압용 권총 한 발 맞았다고 쇼크로 기절이라니. 제가 다 부끄러워집니다만."
  "망할 새끼!! 지옥에나 떨어져버리라지!!!"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욕은 소용 없답니다, 데이비드."

  자아, 그것보다는. 카프카가 가만히 웃으며 두 개의 방문을 가르켰다.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귓바퀴에 입술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으며 속살거렸다.

  "왼쪽은 도리안 펠가의 방, 들어가면 당신은 죽습니다. 오른쪽은 마담 버지니아의 방. 들어가면 당신은 삽니다. 이 정도 선택의 권한은 줘야겠지요, 데이비드?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런웨이의 황제는?"

  사로잡힌 짐승이 되어 황제는 으르렁거렸다. 어찌나 결박을 잘 했던지 도저히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버터플라이 나이프는 카프카의 손안에서 장난감 마냥 돌아가고 있었다.

  "...왼쪽으로 들어가겠어."
  "그 쪽, 죽는다니까요?"
  "네 말은 믿지 않아! 반대겠지!"

  이런 이런. 난 모릅니다. 난폭하게 데이비드를 일으켜 세운 카프카가 왼쪽 방문을 열었다. 싸한 피냄새를 묻힌, 녹슨 금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얼어붙을 것 같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바이바이."

  탁, 하고 밀쳐져 방안으로 들어간 순간, 문을 닫았다.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찢어지는 비명소리에도 카프카는 그저 으쓱,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언제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니 주의하세요.' 라고, 나는 분명 가르쳤습니다, 데이비드."

 

 

 

 

  천국에도 그림자는 진다. 밝기 때문에, 그 낙원은 너무나 밝고 아름답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짙게.
  카프카는 다시금 시트에 파고들었다. 시큼한 밤꽃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지만, 시트를 바꿀만큼의 기력은 터럭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일단 자신은, 매우 졸렸기 때문에.

  "내일은 리하르트씨에게 가볼까....."

  비명소리가 끈덕지게 귓가에 달라붙는다. 아무래도 오늘은 악몽을 꿀 것 같다.

 

 

by YukiHi | 2007/10/07 23:02 | Community | 트랙백 | 덧글(0)

단문묘사 40제


출처
:
http://cistus.blog4.fc2.com/

번역 : http://blog.naver.com/lighttrap902.do/

 

 

 

 

 

그 첫번째
 주제에 맞춰서, 65자 내외로 장면을 묘사해주세요.
 

그 두번째

 가능한 한,

 「모놀로그(내면묘사/마음의 소리)」, 「추상성」, 「논리적 정의」를

 배재합시다.

 설명조 문장도 피하고, 묘사를 보고 「장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합시다.

 어쨌든 구체적인 묘사가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 세번째

 스토리성은 중요합니다.

 65자 안에서 독립된 드라마가 보일 수 있도록 합시다.

 일련의 주제의 「주인공」「시점」이 동일인물이 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만,

 「연재물」이 되는 것은 가급적 피합시다.

 기왕하는 단문묘사, 우선 주제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듭시다.

 짧더라도 이야기가 만들어지도록 합시다.

 

그 네번째 …상급 단계로의 힌트

 마지막에 반전을 집어넣으면 재미있어집니다.

 예를들면, 중간까지 평범한 배경이었던 것이, 마지막 문장으로 반전해서 기묘한

 것이 된다, 라든가.


그 다섯번째 …상급 단계로의 힌트

 흔히 있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게 자신의 문장을 갈고닦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들면, 입학식 → 만개한 벚꽃, 여름의 더위 → 땀 은 평범합니다.

 그 대신 입학식은 「리셋되는 인간관계」,

 더위를 묘사할 때는 「짙은 그림자」로,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디까지나 관리인의 경우이므로 제멋대로일수도 있지만)
 자신만의 시점을, 하고 명심하며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바뀝니다.

 

그 여섯번째

 어느정도 완성했다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평을 듣는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 사람은 문장을 보는 눈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괜찮고

 평소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직하고 객관적인 의견.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묘사를 목표로 합시다.

 

 

 

 

00. 이름과 사이트명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괜찮다면 아무거나 한 마디.

 

雪火[YukiHi] 입니다. 유키히라고들 부릅니다.
이글루를 사용하며, 이글루명은 Paradise.

모쪼록 글을 더 잘쓸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01. 고백 (告白)
 02. 거짓말 (噓)
 
03. 졸업 (卒業)
 04. 여행 (旅)
 05. 학문 (學ぶ)
 06. 전차 (電車) 
  07. 애완동물(ペット)
 08. 버릇 (癖)
 09. 어른 (おとな)
 10. 식사 (食事)
 11. 책 (本)
 12. 꿈 (夢)
 13. 여자와 여자 (女と女)
 14. 편지 (手紙)
 15. 신앙 (信仰)
 16. 놀이 (遊び)
 17. 첫체험 (初体驗)
 18. 일 (仕事)
 19. 화장 (化粧)
 20. 분노 (怒り)
 21. 신비 (神秘)
 22. 소문 (噂)
 23. 그와 그녀 (彼と彼女)
 24. 슬픔 (悲しみ)
 25. 삶 (生)
 26. 죽음 (死)
 27. 연극 (芝居)
 28. 몸 (体)
 29. 감사 (感謝)
 
30. 이벤트 (イベント)
 31. 부드러움 (やわらかさ)
 32. 아픔 (痛み)
 33. 좋아함 (好き)
 34. 어제와 오늘 (今昔)
 35. 갈증 (渴き)
 36. 낭만 (浪漫)
 37. 계절 (季節)
 38. 이별 (別れ)
 39. 욕구 (欲)
 40. 선물 (贈り物)

 

 

 

완성된 것은 붉은색으로 표시됩니다.




by YukiHi | 2007/09/29 22:30 | Subject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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